
누구나 그렇듯 잘 먹고 자 살고 싶다는 막연한 마음이기도 했지만, 저에게는 조금 더 구체적인 바람이 있었어요.
돈에 쫓기지 않을 만큼 안정되어 있고, 그래서 나 하나를 건사하는 데 마음을 다 써버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
어머니께 무언가를 해드리고 싶을 때 형편부터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감사한 이들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 현실적인 여유가 없어 망설이지 않아도 되는 사람.
저에게 성공은 그런 모습에 가까웠습니다.
꼭 물질적으로 사람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살아보니 현실에 계속 쫓기고 있을 때 마음의 여유까지 지켜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꽤 오래전부터 '여유 있는 사람' 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 마음은 생각보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의 저는 일하는 어머니 옆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집에서 미싱으로 한복 치마를 만들기도 했고, 작은 가게에서 음식 장사도 하셨고,
겨울철에는 무거운 절임 배추를 오토바이에 싣고 배달을 직접 하기도 하셨습니다.
어렸던 저의 눈에 어머니는 늘 '일하는 사람' 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생 때부터 엄마 옆에 붙어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엄마, 내가 커서 돈 많이 벌어서 꼭 호강 시켜줄게."
그때의 제가 돈이나 성공을 안다면 얼마나 알았을까요?
그저 내가 잘 크기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엄마가 더 이상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어른이 된 뒤에도 그 마음은 오래 남았습니다.
내가 잘 되는 것이 나 하나의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잘 커서 보답하고 싶었고, 나를 믿어준 사람들에게도 잘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여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하였고, 안정적인 길에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몇 년 뒤 스스로 안정적인 길을 떠나 전혀 다른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냥 제가 원하는 삶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선택 자체를 후회한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부터 마음 한구석에 또 하나의 숙제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내가 선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것.
안정적인 것을 내려놓았으니 더 잘 되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그저 그렇게 살면 안 될 것만 같았어요.
주변 사람들에게도, 가족에게도, 그리고 어쩌면 무엇보다 제 자신에게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봐, 나 잘하고 있잖아. 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잘 하고 싶었고, 목표가 생기면 결과를 내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잘해낸 일들도 있었어요.오랫동안 운동선수 생활을 하며 바라던 결과를 얻은 적도 있었고,새로운 일을 시작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작은 사업을 꾸려가기도 했고, 하고 싶었던 공부를 뒤늦게 시작하기도 했습니다.어떤 순간의 저만 잘라 놓고 보면 꽤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순간들이 있었으니까요.
이 산만 넘으면 좀 더 괜찮아지겠지.그런데 어떻게든 큰 산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나타나더라구요.한쪽에서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면 다른 쪽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열심히 일하고 있는데도 삶은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고, 당장의 결과가 좋아도 그것이 오래 쌓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경제적인 부분들은 제게 꽤 오랫동안 큰 숙제로 남았습니다.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라기보다,이제는 조금 덜 쫓기면서 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그 지점에는 좀처럼 도착하지 못하더라구요.
그래도 계속 다시 시작했습니다.이번 것만 해결하면. 여기까지만 정리하면. 이 고비만 넘기면.그러면 조금은 편안하게 여유를 찾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숨을 한 번 크게 쉬어볼 만하면 또 다른 일이 생기고, 반복이었습니다.
예전에 바닷가에서 테트라포트에 붙어 있던 물이끼를 한참 바라보고 선 적이 있습니다.물이 빠져 이제 숨을 좀 쉬나 싶으면 다시 파도가 밀려들어와 이끼를 덮었습니다.그 모습이 당시의 저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한참을 서 있었어요.
딱 숨통이 트이나 싶을 때 다시 차오르는 물.
그 때의 저는 그것조차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이끼가 물을 머금듯 나도 이 경험들을 흡수하고 있는 것이라고.나는 이것도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지금도 그 생각이 모두 잘못됐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다만 지금 와서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계속 버틸 수 있다는 것' 과 '계속 버텨야 한다는 것' 은 다른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이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분명 잘한 일도 있었습니다.노력해서 얻어낸 결과도 있었고, 그로 인한 성취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어요.하지만 그 순간들을 모두 모아 놓는다고 해서 제가 마음속으로 그려왔던'누가 봐도 성공한 사람' 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잘한 일은 있었지만, 제가 꿈꾸었던 삶에는 도착하지 못한 것입니다.
실패한 일도 많았습니다.선택의 순간에서 잘못 된 판단도 있었고, 열심히 했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일도 있었습니다.끝까지 가져가지 못한 것도 있고, 하나를 해결하려다 또 다른 것을 잃은 적도 있습니다.
그걸 모두 좋은 경험이었다는 말로 무조건 포장하고 싶지도 않습니다.실패를 경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실패가 아닌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어떤 일에서는 분명하게 실패했습니다.그리고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실패 하나하나보다 계속 다시 증명해야 한다는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 넘어지면 다른 결과를 만들어 만회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다시 잘하면 괜찮아질 것 같았고, 이번에는 정말 안정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그렇게 다시 일어나고, 다시 달리고, 또 다른 문제를 만났습니다.몸과 체력마저 예전 같지 않은데 현실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었을 때,성취감을 느낄 틈도 없이 다시 다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간이 반복되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또다시 일어나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지쳤습니다.
오래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 아래에서 받아주겠다고 양팔을 벌리고 있어도, 저는 그 사람을 믿고 아래를 향해 뛰어내리지 않을 것 같다고.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생각했습니다.친구의 말이 맞았어요.저는 누군가 나를 받아주지 못할 가능성을 혼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이것 또한 오만한 생각인 줄 모르고.
그래서 누군가 받아주겠다고 해도 그 사람의 옆 맨바닥으로 뛰어내리는 쪽을 선택했습니다.혹시 그가 나를 받아주다가 다치기라도 할까봐.그게 상대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삶을 대하는 방식도 어쩌면 비슷했던 것 같아요.힘든 일이 생기면 도움을 요청하기보단 해결하려 했고, 무너지면 다시 일어났고,여유가 없을수록 오히려 조금 더 괜찮아진 다음에 주변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가족에게도 그랬습니다.보고싶으면서도 내가 조금 더 괜찮아진 뒤 찾아가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어릴 때 그렇게 자신 있게 했던 약속을 아직 제대로 지키지 못헀다는 생각 때문에흐르는 시간이 소중하다는걸 알면서도 미루기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잘 되면 사랑하고, 여유가 생기면 고마워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들에게 기대려고 했습니다.그 '나중' 은 생각보다 빨리 오지 않는데 말입니다.
지금의 제가 지나온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으려 했습니다.그렇다고 모두 좋은 경험이었다고 포장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잘한 것은 잘한 것이고, 실패한 것은 실패한 것입니다.
제가 부족해서 놓친 것도 있었고, 욕심 때문에 잘못 판단한 순간도 있었을 겁니다.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었습니다.이제는 그것을 굳이 다른 이름으로 바꾸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신 실패를 인정하는 것과 그 시간을 전부 후회하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실패한 뒤에야 알게 된 제 모습도 있었으니까요.
무엇을 잘하는지만큼 무엇을 감당하지 못하는지도 조금 알게 되었고,혼자 버티는 것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그토록 원했던 '성공' 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처음으로 제대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가족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고, 고마운 사람들에게 시간과 마음을 편하게 쓸 수 있는 여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갈 것이고, 새로운 것을 또 시작할 수도 있고, 또 욕심 나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다만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잘 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괜찮은 사람이고, 하나를 실패하면 다른 성공으로 그것을 만회해야 하고,모든것이 괜찮아진 뒤에야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
저는 그 방식으로 꽤 오래 살아오다 결국 지쳤습니다.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돈이 많으면 잘 사는 것인지,좋아하는 일을 하면 잘 사는 것인지,마음이 편안하면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아직 제게는 정확한 답이 없습니다.다만 이제는 잘 사는 법을 빨리 찾아내려고 하기보다,왜 저는 그렇게까지 '잘 살고 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는지' 를 천천히 제대로 돌아보려고 합니다.
이 질문에서부터 LIFE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